한왕용이 건넨산책/내 청춘 山에 걸고-산이 자꾸 산을 가린다
글 김선미 기자·사진 남영호 기자
진부하기 짝이 없는 제목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청춘’이나 ‘산’, ‘건다’는 말 모두 신파 영화의 제목으로나 어울릴 법한 단어들이다. 어떤 은유나 상징도 없이 제목 하나로 모든 걸 말해주는 이 저돌성, 맨몸뚱이 하나만 믿고 7대륙 최고봉과 남극과 북극 도보 횡단을 해낸 우에무라 나오미를 그대로 닮았다. 서른한 살 때 쓴 책이니, 아직 삶의 격정을 지그시 누를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을 터.
이 제목은 곧바로 이렇게 되묻는 것도 같다. 오늘날 대체 어떤 젊은이가 감히 산 따위에 청춘을 거는가.
그래서 더욱 사람들을 끌어당긴 걸까.
이 책은 국내 산악문학 가운데 베스트셀러 축에 든다. 평화출판사는 70년대 처음 나온 양장본 3천부에 1994년 새로 펴낸 포켓북을 1천부 정도 팔았다고 한다.
5천부도 안 되는 판매 부수를 가지고 베스트셀러 운운하는 산서의 현실이 눈물겹지만, 아무튼 신파는 힘이 센 모양이다. 누구도 처음부터 돈과 명예에만 청춘이란 찬란한 시절을 걸고 싶진 않았을 테니까.
한왕용은 대학 산악부 시절 이 책을 읽었다.
산악부실에 꽂혀 있던 책이 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온 지 10여 년이 넘었는데 지금까지 반납을 안 하고 있다. 산악부가 ‘3D동아리’로 분류되는 요즘 과연 그 책을 돌려받을 후배들이 있기나 한 지 그것이 궁금하다.
“저랑 많이 비슷한 것 같아요. 엉겁결에 산악부에 들어간 것도 그렇고….” 한왕용은 우석대 식품영양학과 85학번이다.
세계에서 11번째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산악인의 명함과는 왠지 안 어울려 보이지만. 우에무라 나오미는 메이지대학 농산제조학과 60학번이다. 둘 다 공부에는 관심 없었고 전공과 관련해 무슨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모두 어영부영 선배들한테 이끌려 산악부에 발을 들여놓았다지만, 한번 산에 들어간 뒤로는 그 이상 매력적인 일을 찾지 못했다. 청춘을 확 뒤집어지게 만들 연애사건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나오미는 홀로 개썰매를 타고 3000km에 이르는 남극 여행에서 돌아와 동네 분식집에서 만난 노사끼 기미꼬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한왕용은 1998년 안나푸르나 원정 당시 네팔에서 의료봉사활동 중이던 아내를 처음 만났다. 나오미가 서른두 살 한왕용이 서른세 살, 둘 다 이미 청춘의 절정을 산에서 불사른 뒤였다.
산을 향해 오로지 ‘돌격 앞으로!’ 나아가는 대책 없는 열정과 대나무 장대 하나만 믿고 크레바스 위를 헤쳐 나가는 무시무시한 모험담… 자신이 가 닿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사내들의 동경과 대리만족이 우에무라 나오미의 책에 가장 큰 박수를 보내는 것 같다.
그러나 한왕용은 좀 다르게 읽는다. 그를 자극한 것은 극한의 모험보다는 산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의 공사판, 캘리포니아의 포도농장, 알프스의 스키장 잡부로 전전긍긍하던 인간 나오미의 모습이다. “단 1프랑이라도 더 벌어야했다. 그래서 술과 커피는 여전히 멀리하고 있었다.
커피 한잔 값으로 케냐에서는 두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돈, 돈 하며 산행자금 만들기에만 골몰해 기인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에무라 나오미는 나중에 이런 자신의 스타일을 ‘단기간에 효율적으로 일해 장기간 산에 오른다.
이것이 나의 경제학이다’라고 깔끔하게 정리하기도 했다. 한왕용도 서울로 올라오기 전 지리산 뱀사골 산장에서 kg당 1천원씩 받고 등짐을 져 날라 하루에 7~8만원씩 장기산행 자금을 모았다. 그때 꿈꾸던 장기산행이란 게 고작 설악산 원정이었으니 히말라야의 여비를 마련하는 데는 어떤 고초가 따랐을지….
그는 지금도 원정비용의 상당 부분을 스스로 충당했다는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도움이 필요한 부분에만 최소한으로 손을 벌렸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유명 장비업체를 운영하는 산악인은 필요 이상으로 공짜를 요구하는 원정대들이 너무 많다면서 “왕용이는 좀 달라. ‘형, 망치 한 자루만 주세요’ 이런 식이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통상 몇 천만원씩 드는 히말라야 원정을 1998년 낭가파르바트에선 나관주씨와 둘이서 단돈 700만원으로 해치웠다는 것도 한왕용의 스타일을 말해준다.
이제 안정된 직장의 후원 아래 여유 있게 진행할 법도 한 클린마운틴 원정에서조차 그는 한 푼도 헤프게 쓰는 법이 없다. 나는 그가 쓸데없이 비싼 위성인터넷 요금이 많이 나왔다고 후배를 야단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우에무라 나오미가 단독자의 길을 가게 된 것도 결국 돈에 대한 강박증 때문이었다.
몽블랑 스키장에서 일하다가 메이지대학 원정대의 초청으로 고줌바캉(7646m) 등정에 성공했을 때 모두의 축하 속에서도 정작 그는 기뻐할 수 없었다. “내가 정상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원정대의 본대원이 아니었고 다른 대원들처럼 원정을 위해 금전적으로 애를 쓰지도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는 산에서도, 인생에서도 무임승차를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단독등정에 몹시 끌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아무리 작은 등산이라도 스스로 계획하고 준비하여 혼자서 행동한다면 그야말로 진정 흐뭇한 등산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흐뭇한 여정도 27살, 아콩카구아 단독 등정을 앞둔 시점에서 이렇게 되묻는다. “돌아가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장래를 결정할 중요한 문제들이 그냥 남아 있지 않은가. 지나간 일만 이것저것 끄집어내어 감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나는 현재에, 그리고 미래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위대한 모험가라도 일상의 산이 더 두려운 법이다. 어떤 험준한 산봉우리라도 그 산의 높이가 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누가 자기 생 앞에 놓인 변화무쌍한 산의 높이를 짐작이나 할 수 있는가. 우에무라 나오미는 나중에 ‘모험의 경제학’이란 글에서 그의 일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번 돈을 몽땅 걸어서-이것이 등산가 시대부터의 경제학이며 내게 있어서 돈이란 모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쓰기 위한 것, 써서 나 자신에게 정신적인 강박을 더하게 하는 자극인 것이다.”
그러니 하숙집에서 신혼방으로 옮겨 갈 짐이 리어카도 필요 없이 ‘세 번 들어 나르니까 이사가 끝났다.’
이런 사내와 가정을 꾸린 여자의 선택도 모험 아닐까. 기미꼬의 인생엔 나오미가 크레바스였을까. 사랑이라는 대나무 장대 하나만 믿고서 미지의 험로 속으로 걸어 들어간 여자.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오미의 ‘사나이’다움에 끌리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일에든 온 정신을 쏟아가며 달려드는 사람이 애처롭고 가여웠다”고 한다. 나 역시 이 사내의 청춘 고백에서 외로움이 먼저 읽혔다.
나오미가 매킨리 동계 단독등정에 성공한 뒤 실종됐을 때 그의 아내는 이렇게 흐느꼈다.
“모험이란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라고 늘 큰 소리쳤어요. 그러데 당신 이게 뭐예요. 창피하지도 않아요?”
한왕용은 14좌의 마지막 목표였던 브로드피크로 떠나기 전 성공 여부에 상관없이 다시는 정상을 목표로 원정을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아내와 약속했다. 대신 히말라야의 청소부를 자처했다. 그는 이제 마흔이다. 어린 두 아들들 앞에 놓인 산봉우리가 점점 커져 자기 앞의 산을 가리고 있다.
산 사람의 청춘은 이렇게 끝나는 걸까.
한왕용에게 우에무라 나오미의 책을 건네받던 찻집 벽에 이런 낙서가 있었다.
“늙는다는 것은 신의 축복이고 젊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삶의 기술이다.” 나오미에게 산은 그의 청춘을 유지하는 명쾌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흔세 살에서 더 이상 나이 듦의 축복을 받을 수는 없었다. 부디 나오미의 ‘청춘’을 읽고 산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산과 함께 늙어가는 ‘축복’과 ‘기술’이 함께 있어라.
글 김선미 기자·사진 남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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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청춘 山에 걸고> 우에무라 나오미 지음 / 곽귀훈·김성진 옮김 / 평화출판사 / 1994년 5월 20일 펴냄 |
진부하기 짝이 없는 제목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청춘’이나 ‘산’, ‘건다’는 말 모두 신파 영화의 제목으로나 어울릴 법한 단어들이다. 어떤 은유나 상징도 없이 제목 하나로 모든 걸 말해주는 이 저돌성, 맨몸뚱이 하나만 믿고 7대륙 최고봉과 남극과 북극 도보 횡단을 해낸 우에무라 나오미를 그대로 닮았다. 서른한 살 때 쓴 책이니, 아직 삶의 격정을 지그시 누를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을 터.
이 제목은 곧바로 이렇게 되묻는 것도 같다. 오늘날 대체 어떤 젊은이가 감히 산 따위에 청춘을 거는가.
그래서 더욱 사람들을 끌어당긴 걸까.
이 책은 국내 산악문학 가운데 베스트셀러 축에 든다. 평화출판사는 70년대 처음 나온 양장본 3천부에 1994년 새로 펴낸 포켓북을 1천부 정도 팔았다고 한다.
5천부도 안 되는 판매 부수를 가지고 베스트셀러 운운하는 산서의 현실이 눈물겹지만, 아무튼 신파는 힘이 센 모양이다. 누구도 처음부터 돈과 명예에만 청춘이란 찬란한 시절을 걸고 싶진 않았을 테니까.
한왕용은 대학 산악부 시절 이 책을 읽었다.
산악부실에 꽂혀 있던 책이 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온 지 10여 년이 넘었는데 지금까지 반납을 안 하고 있다. 산악부가 ‘3D동아리’로 분류되는 요즘 과연 그 책을 돌려받을 후배들이 있기나 한 지 그것이 궁금하다.
“저랑 많이 비슷한 것 같아요. 엉겁결에 산악부에 들어간 것도 그렇고….” 한왕용은 우석대 식품영양학과 85학번이다.
세계에서 11번째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산악인의 명함과는 왠지 안 어울려 보이지만. 우에무라 나오미는 메이지대학 농산제조학과 60학번이다. 둘 다 공부에는 관심 없었고 전공과 관련해 무슨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모두 어영부영 선배들한테 이끌려 산악부에 발을 들여놓았다지만, 한번 산에 들어간 뒤로는 그 이상 매력적인 일을 찾지 못했다. 청춘을 확 뒤집어지게 만들 연애사건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나오미는 홀로 개썰매를 타고 3000km에 이르는 남극 여행에서 돌아와 동네 분식집에서 만난 노사끼 기미꼬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한왕용은 1998년 안나푸르나 원정 당시 네팔에서 의료봉사활동 중이던 아내를 처음 만났다. 나오미가 서른두 살 한왕용이 서른세 살, 둘 다 이미 청춘의 절정을 산에서 불사른 뒤였다.
산을 향해 오로지 ‘돌격 앞으로!’ 나아가는 대책 없는 열정과 대나무 장대 하나만 믿고 크레바스 위를 헤쳐 나가는 무시무시한 모험담… 자신이 가 닿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사내들의 동경과 대리만족이 우에무라 나오미의 책에 가장 큰 박수를 보내는 것 같다.
그러나 한왕용은 좀 다르게 읽는다. 그를 자극한 것은 극한의 모험보다는 산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의 공사판, 캘리포니아의 포도농장, 알프스의 스키장 잡부로 전전긍긍하던 인간 나오미의 모습이다. “단 1프랑이라도 더 벌어야했다. 그래서 술과 커피는 여전히 멀리하고 있었다.
커피 한잔 값으로 케냐에서는 두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돈, 돈 하며 산행자금 만들기에만 골몰해 기인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에무라 나오미는 나중에 이런 자신의 스타일을 ‘단기간에 효율적으로 일해 장기간 산에 오른다.
이것이 나의 경제학이다’라고 깔끔하게 정리하기도 했다. 한왕용도 서울로 올라오기 전 지리산 뱀사골 산장에서 kg당 1천원씩 받고 등짐을 져 날라 하루에 7~8만원씩 장기산행 자금을 모았다. 그때 꿈꾸던 장기산행이란 게 고작 설악산 원정이었으니 히말라야의 여비를 마련하는 데는 어떤 고초가 따랐을지….
그는 지금도 원정비용의 상당 부분을 스스로 충당했다는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도움이 필요한 부분에만 최소한으로 손을 벌렸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유명 장비업체를 운영하는 산악인은 필요 이상으로 공짜를 요구하는 원정대들이 너무 많다면서 “왕용이는 좀 달라. ‘형, 망치 한 자루만 주세요’ 이런 식이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통상 몇 천만원씩 드는 히말라야 원정을 1998년 낭가파르바트에선 나관주씨와 둘이서 단돈 700만원으로 해치웠다는 것도 한왕용의 스타일을 말해준다.
이제 안정된 직장의 후원 아래 여유 있게 진행할 법도 한 클린마운틴 원정에서조차 그는 한 푼도 헤프게 쓰는 법이 없다. 나는 그가 쓸데없이 비싼 위성인터넷 요금이 많이 나왔다고 후배를 야단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우에무라 나오미가 단독자의 길을 가게 된 것도 결국 돈에 대한 강박증 때문이었다.
몽블랑 스키장에서 일하다가 메이지대학 원정대의 초청으로 고줌바캉(7646m) 등정에 성공했을 때 모두의 축하 속에서도 정작 그는 기뻐할 수 없었다. “내가 정상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원정대의 본대원이 아니었고 다른 대원들처럼 원정을 위해 금전적으로 애를 쓰지도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는 산에서도, 인생에서도 무임승차를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단독등정에 몹시 끌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아무리 작은 등산이라도 스스로 계획하고 준비하여 혼자서 행동한다면 그야말로 진정 흐뭇한 등산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흐뭇한 여정도 27살, 아콩카구아 단독 등정을 앞둔 시점에서 이렇게 되묻는다. “돌아가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장래를 결정할 중요한 문제들이 그냥 남아 있지 않은가. 지나간 일만 이것저것 끄집어내어 감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나는 현재에, 그리고 미래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위대한 모험가라도 일상의 산이 더 두려운 법이다. 어떤 험준한 산봉우리라도 그 산의 높이가 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누가 자기 생 앞에 놓인 변화무쌍한 산의 높이를 짐작이나 할 수 있는가. 우에무라 나오미는 나중에 ‘모험의 경제학’이란 글에서 그의 일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번 돈을 몽땅 걸어서-이것이 등산가 시대부터의 경제학이며 내게 있어서 돈이란 모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쓰기 위한 것, 써서 나 자신에게 정신적인 강박을 더하게 하는 자극인 것이다.”
그러니 하숙집에서 신혼방으로 옮겨 갈 짐이 리어카도 필요 없이 ‘세 번 들어 나르니까 이사가 끝났다.’
이런 사내와 가정을 꾸린 여자의 선택도 모험 아닐까. 기미꼬의 인생엔 나오미가 크레바스였을까. 사랑이라는 대나무 장대 하나만 믿고서 미지의 험로 속으로 걸어 들어간 여자.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오미의 ‘사나이’다움에 끌리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일에든 온 정신을 쏟아가며 달려드는 사람이 애처롭고 가여웠다”고 한다. 나 역시 이 사내의 청춘 고백에서 외로움이 먼저 읽혔다.
나오미가 매킨리 동계 단독등정에 성공한 뒤 실종됐을 때 그의 아내는 이렇게 흐느꼈다.
“모험이란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라고 늘 큰 소리쳤어요. 그러데 당신 이게 뭐예요. 창피하지도 않아요?”
한왕용은 14좌의 마지막 목표였던 브로드피크로 떠나기 전 성공 여부에 상관없이 다시는 정상을 목표로 원정을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아내와 약속했다. 대신 히말라야의 청소부를 자처했다. 그는 이제 마흔이다. 어린 두 아들들 앞에 놓인 산봉우리가 점점 커져 자기 앞의 산을 가리고 있다.
산 사람의 청춘은 이렇게 끝나는 걸까.
한왕용에게 우에무라 나오미의 책을 건네받던 찻집 벽에 이런 낙서가 있었다.
“늙는다는 것은 신의 축복이고 젊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삶의 기술이다.” 나오미에게 산은 그의 청춘을 유지하는 명쾌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흔세 살에서 더 이상 나이 듦의 축복을 받을 수는 없었다. 부디 나오미의 ‘청춘’을 읽고 산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산과 함께 늙어가는 ‘축복’과 ‘기술’이 함께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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